여행-인생-의 목적을 이윽고 알았다.“거친 사생이 밑그림이 되고, 이윽고 완성된 그림이 되기를.”- 빈센트 반 고흐삶이라는 캔버스를 채우는 화가의 여행바람그림책 138. 화가는 다시 여행길에 나선다. 안개가 낀 숲속, 달빛이 비치는 밤과 빛과 시간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시든 해바라기, 기차를 타고 움직일 때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 그리고 싶은 풍경은 과거의 기억과 함께 화가의 손에서 그려지길 기다린다. 오랫동안 화가로 살아온 이세 히데코의
... 인생관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그림책.기획 의도● 이세 히데코의 모든 것을 담은 한 권올해로 그림책을 만든 지 40년이 되는 작가이자 화가인 이세 히데코가 쓰고 그린 책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야기로 조금씩 다른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결이 비슷한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생명과 삶, 단절과 죽음, 미래와 이어짐과 순환. 그 속에서, 작가는 ‘생명이 가진 힘을 믿고 있구나.’라는 감상을 받습니다.작가의 작품 중 하나인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는 상실로 인한 아픔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 이야기하며 슬픔을 나누고, 첼로 연주를 함께하며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돌봅니다. 타인과 함께하며 회복한 마음은 또 다른 타인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지요.〈첼로, 노래하는 나무〉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무는 베어졌습니다. 새 옹알이를 알려주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첼로가 되어, 할아버지의 기억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소중한 기억이 되어 살아갑니다. 첼로는 ‘나’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통해 더 먼 미래로 이어질 것이고, 할아버지의 기억 또한 ‘나’의 아이들을 통해 이어지겠지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언뜻 죽으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나무의 아기들〉은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뒤 아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만든 책입니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남아 싹을 틔우는 나무 씨앗처럼, 아이들도 언제 어디서든 미래를 향해 싹을 틔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지요.생명은 함께하며 더욱 강해지고, 다른 생명으로 인해 이어지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저마다 하나의 나무로 자라나는 씨앗입니다. 나무는 씨앗이 자라난 모습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이세 히데코라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이세 히데코의 생각과 삶을 오롯이 보여주는 한 권입니다. ●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캔버스를 채워가는 화가삶은 흔히 여행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이세 히데코의 삶을 보여주는 〈그린다는 것〉은 여행길을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작가인 화자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면서, 독자가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처럼 보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은유하는 것도 같습니다.화가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봅니다. 안개에 따라 전혀 다르게도 보이는 산의 풍경, 캔버스에 담고 싶은 달빛의 푸름과 저녁놀, 빛과 시간이 지나며 지상의 별처럼 보이는 시든 해바라기들…. 그러나 화가는 자신이 본 풍경을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않습니다. 화가가 그려낸 캔버스 속에는 그날 느낀 바람과 빛과 냄새가,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있습니다. 물론 붓을 쥔 화가를 구성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도 함께 있지요. 그려진 그림들은 화가의 새로운 기억이 되고, 화가는 새로운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 여행길을 떠납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 빈 캔버스는 계속해서 생겨나기 마련이니 당연한 결과입니다.이는 화가만 느낄 수 있거나, 특정 누군가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친구들과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그동안 겪어온 경험과 시간이 모두 다르기에 자신만의 감상이 생기지요. 새로운 순간은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밑바탕이 되어 자신만의 감상을 담은 순간이 생기고, 또 그 순간은 기억이 되길 반복하며 캔버스는 자기만의 기억으로 채워집니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화가인 셈이기에, 〈그린다는 것〉은 누구나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책입니다.● 나만의 캔버스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더욱 특별한 이야기〈그린다는 것〉에는 하늘이 자주 나옵니다. 달이 뜬 밤하늘, 노을이 지는 저녁 하늘, 흰 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낮 하늘, 눈이 내려 흐린 하늘과 펭귄이 바라보는 머나먼 하늘까지. 하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머리 위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언제 보느냐, 어디에서 보느냐, 무엇을 하며 보느냐에 따라 받는 느낌이 달라지지요. 그렇기에 화가는 ‘기억은 하늘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행위를 통해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파편적으로 느껴지지만, 각 장면이 서로 동떨어져 존재하는 그림책은 아닙니다. 화가는 낯선 곳을 홀로 여행하며 기억을 만들어 갑니다. 여행 중 만난 강아지를 보고 따라오면 안 된다고 하다가도, 강아지가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걸 보고는 무작정 편지를 씁니다.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말이지요. 기억을 오롯이 자신만의 감상으로 표현하는 화가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화가는 혼자가 아닙니다. 작고 낯선 마을의 미술관에서 만난 비슷한 분위기의 누군가를, 첫 전시회에서 다시 보게 되는 것처럼요.전시회를 준비하다 말고 대충 자리를 잡아 이야기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편안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표현하며 타인에게 내보이는 화가들의 유대인 셈이지요. 이 순간과 유대, 감정 역시 화가에게는 기억이 되어 새로운 캔버스에 담길 것입니다.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 화가는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 오랫동안 고민하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겠지요. 〈그린다는 것〉이 캔버스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화가의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이유입니다.〈그린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지만,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고 타인에게 내보이는 일을 하는 예술가들은 더더욱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세 히데코의 작품 세계를 더 알고 싶다면 : 고흐와 겐지〈그린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 이야기이지만, 이세 히데코의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세 히데코의 삶을 구성하는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첼로와 미술, 파리 유학과 잘 보이지 않게 된 눈 등 다양한 순간이 지금의 작가를 만들었지만, 작가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두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와 ‘미야자와 겐지’를 향한 마음 또한 현재의 이세 히데코를 만들고 있습니다.이세 히데코는 〈고흐, 나의 형〉이라는 그림책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를 조명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그림에 담아내려 했던 고흐처럼, 이세 히데코 또한 자신의 느낌 그대로를 그림에 담아내려 합니다. 미야자와 겐지는 일본의 국민 동화 작가로,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은하철도의 밤〉을 쓴 작가입니다. 작가는 미야자와 겐지의 〈바람의 마타사부로〉, 〈쏙독새의 별〉 〈수선월의 4일〉 등 많은 글에 그림을 그리며 원화전을 열 만큼 겐지의 세계를 자기만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두 명의 고흐: 고흐와 겐지, 37년 마음의 궤적〉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시대도 국적도 다른 두 명의 예술가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37년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점과 생전보다 사후에 작품을 인정받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의 마음까지 돌보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일 것입니다.작가가 오랫동안 사랑한 두 예술가의 흔적은 〈그린다는 것〉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표지부터 고흐의 〈고흐의 방〉 연작(1888-1889) 오마주입니다. 작가는 〈고흐의 방〉에 고흐가 그린 다른 세 작품을 더했고, 화가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곳곳에 붓통과 캔버스, 스케치북과 말린 종이들을 삽입해두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마타사부로’와 ‘올리브와 사이프러스 그림만 남겨두고 떠난 화가’를 직접 언급하며 두 예술가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요.두 예술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마음은 작가에게 전해져 새롭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생각, 마음이 이세 히데코를 만나 현재까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넓어진 셈이지요. 두 작가에게서 이어진 이세 히데코만의 작품 세계를 〈그린다는 것〉으로 느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