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식물처럼 독보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며 자생하는 아밀의 세계이 세계의 소녀들은 나무처럼 자기 안의 소녀를 견디며 자란다.‘꽃이 핀 줄 알고 꺾으려 들었다가 심연까지 뻗은 뿌리와 하늘을 가릴 줄기에 오히려 달려 갈 것이다.’ (SF 편집자 최지혜), ‘무덤에서 돋아난 싹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번식하는 것처럼 확장될 것이다.’ (SF 소설가 구한나리)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하며 자생해온 희귀 식물처럼, 매번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세계
...를 선보여온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아밀이다. 2018 〈SF 어워드〉 우수상 수상(「로드킬」), 2020 〈SF 어워드〉 대상 수상(「라비」)으로 우리에게 강렬한 자취를 남긴 아밀의 신간 『너라는 이름의 숲』이 허블에서 출간되었다. 아밀의 전작 『로드킬』이, 여성이라는 인류가 절멸한 미래 사회의 ‘소녀’라는 새롭고 특별한 종種의 출현을 예감케 했다면, 『너라는 이름의 숲』에서는 조금 더 보편적인 소녀가 찾아온다. 바로 모두가 사랑하는 ‘소녀 아이돌’이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팬 역시 ‘소녀’다. 기후 위기로 전 지구에 찾아온 디스토피아, 폐허가 된 지구. 흙먼지가 날리고 모래비가 내리는 서울에서도 맑은 이슬을 머금은 꽃처럼 저 혼자만 싱그러운 아이돌 ‘이채’, 그리고 ‘이채’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니 평범보다 조금 더 평균 이하인 소녀 ‘정숲’. 전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숲의 희망은 오로지 이채뿐이다. 이채의 춤추는 모습, 이채의 음악, 그것들만이 숲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아밀이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는 단순히 기후 위기뿐만이 아니다. 외부의 디스토피아가 기후 위기로 인한 환경파괴라면, 내부의 디스토피아는 소녀들이 직면하고 있는 삶 그 자체다. 서울에서 다소 가난한 고등학교로 묘사되는 연강고등학교의 교실 안,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녀들의 권력관계와 알력 다툼이 이 소설의 또 다른 디스토피아다.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고교 시절을 재현한 것처럼. ‘허다온’을 위시한 연극반 패거리들은 끊임없이 숲을 괴롭힌다. 비밀을 공모하고 소문을 퍼트리며 숲을 곤경에 빠트린다. 나머지 친구들은 허다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밉보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며 희망 없는 생존에만 몰두한다.『너라는 이름의 숲』은 소녀 시절을 마냥 아름답게만 그리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소녀 시절이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훼손된 마음과 상처들로 얼룩진 ‘야만의 시절’이기도 할 것이다. 아밀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희망 없는 소녀들을 야만적이고, 음험하게, 그리하여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그려낸다. 소녀들은 간질거리는 귓속말을 통해 우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우정을 나누던 귓속말을 통해 비밀을 공모하고 어두운 소문을 퍼트리기도 한다. 친구가 다른 친구와 어울리는 것에 묘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우정을 넘어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숲은 먹이사슬의 최하위에서 하루하루를 희망 없이 버티던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