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는 한국에서 흔하디흔한 야생동물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라니의 죽음은 익숙하다. 가장 자주 로드킬 사고를 당하는 동물이며 농촌에 해를 끼치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현상금 3만 원에 포획된다. 매년 인간에 의해 죽는 고라니는 약 25만 마리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사는 고라니 수의 절반이 넘는 숫자다. 문선희 사진작가는 어느 날 고라니와 마주친 강렬한 경험 이후, 그 얼굴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고라니들이 고속도로와 농작지에 출몰하는 것은
...원래의 서식지를 인간에게 침범당했기 때문임을 알았고, 생태적 고려 없는 야생동물 개체 수 조절에 의문을 품었다. 어느새 고라니 현상금 지출액이 고라니에 의한 농작물 피해액보다 커졌지만, 정책은 복잡하게 얽힌 농촌 경제와 생태 문제를 아우르지 못하며 사회는 고라니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이런 속도로 고라니가 사라진다면, 한순간 절멸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으로 작가는 카메라를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다. 《이름보다 오래된: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은 작가가 10년간 찍은 고라니 얼굴 50여 점과 그 긴 여정의 기록이다. 고라니가 작가와 눈을 맞출 때까지 오래 기다려 찍은 얼굴들에는 단 하나뿐인 생명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얼굴들이 생태계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구제역·조류 독감 매몰지를 기록한 《묻다》,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광주시민들의 기억을 모은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등 전작을 통해 생태 문제와 역사적 비극을 직시해온 문선희 작가의 신작으로, 2023년 제13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작가 정혜윤과 장혜령, 생태학자 김산하가 이 작업의 의미를 해설하고 지지하는 글을 함께 실었다.